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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2013~19)/경험

등산을 하다가 이런 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by 허재희 2016.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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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하다가 이런 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연꽃무늬가 그려진 바위가 있지 않나.. 덮개처럼 보이는 바위rk 나뒹굴고 있다..

 

내가 만약 이 곳에 혼자 왔다면 그 가치를 모르고 돗자리를 펴고 가져온 도시락의 식탁으로 썼을지도 모른다.

 

창녕 블로그 팸투어의 마지막 장소였던 옥천사지의 터!!

마지막 장소이다 보니.. 지치고 힘들어서 힘이 남아있는 분만 가게 되었다.

풀숲이라서 모기에게 회식의 기쁨을 선사하는 것을 감수한 옥천사지!!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곳이었다.

 

보통 터만 남아있는 절들은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불타서 없어지거나 도굴을 당하여 훼손 된 것이 많이 있다. 하지만 옥천사지의 터는 그 이유가 달랐다. 외세에 의한 것이 아닌 우리 민족이 불태워 없애버린 문화재였다는 점에서 마음이 아픈 장소였다.

 

옥천사는 고려 말, 공민왕 때 개혁정책을 추진하다가 실패한 신돈이 태어나고 죽었던 곳이라고 한다. 신돈의 어머니가 옥천사지의 노비였기 때문인데 터의 크기로 보아 가늠할 수 있는 절의 규모는 당시 신돈이 공민왕에게 얼마나 큰 총애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절터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잘 깍여진 돌'을 지나서 꽤 걸어갔음에도 비탈에 주춧돌이나 탑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흩어져있었다. 큰 절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었다.

 

 

공민왕이 물러나고 정치적 이야기에 수차례 오르내렸던 신돈!

전민변정도감을 실시했던 인물이었기에 백성들은 매우 좋아했지만 기존의 권력세력인 권문세족에게는 눈엣가시였을거다.

그래서 권문세족은 공민왕이 물러나자마자 그 절터를 비참하게 없애버린 것이 아닐까... 

 

 

탑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물들을 보고 있으니 권문세족의 무사들이 와서 이곳을 처참히 불태우고 탑을 부숴버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같았다.

이것도 우리의 역사기에.. 권력투쟁을 했던 역사의 한 부분이기에.. 우리는 이런 모습도 역사임을 알고 공부를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유물들이 그저 그냥 바위들과 함께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역사의 모습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 보존하면서 팻말이라도 만들어 줄수는 없을까..

풀숲이다보니 풀을 좀 정리해서 유적지다운 모습을 만들어 줄 수는 없을까..

만약 나같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유물이 훼손되지는 않을까..

 

아직 밝혀진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팻말을 만들어놓지 못했다는 생각도 문득든다..

절터라는 것이라도 알고 우리가 방문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창녕문화재를 공부하고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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